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문학동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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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9쪽)
남해의 한 섬에 있는 중학교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온 건 반년 전인 2020년 여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는 이름만 들어봤을 뿐, 정현은 그 섬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도착해보니 섬은 하나가 아니었다. 중학교가 있는 남쪽 섬 말고도 북쪽에 섬이 하나 더 있고 두 섬은 다리로 연결돼 있었다. 그 두 개의 섬을 합쳐 ‘추자’라고 불렀다. 정현이 머문 숙소의 창으로 멀리 북쪽 섬의 번화한 항구가 보였다. 밤에 보이는 불빛은 그것 뿐이었다. 첫날 밤, 정현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먼 항구의 불빛을 아련하게 바라봤다. 그때까지만 해도 섬의 밤은 고요했다. 그 고요한 밤, 그는 김선생에게 문자를 보내 손유미씨가 언제, 어떻게 섬으로 들어와 살게 됐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자신도 이 년 임기로 들어왔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제대로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아이들이 인터뷰를 상세하게 했으니 자세한 건 [우리들의 역사]를 봐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덧붙였다. [우리들의 역사]는 학생들이 만들었다는 인터뷰 책이었다. 정현은 그 책에서 손유미씨에 대한 부분을 찾아 읽으며 첫날 밤을 보냈다.
그러나 둘째 날 밤은 달랐다. 낮부터 바람이 세차게 불고 어두컴컴해지더니 저녁 무렵에는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밤새 바람이 불어왔는데, 덜컹거리는 문을 열고 나가보면 바람의 반은 눈송이들이었다. 날아오는 눈을 맞고 선 언덕의 나무들이 기이하고도 무서운 소리를 냈다. 겨울의 언덕으로 불어오는 눈보라 때문에 정현은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밤새 방에 갇혀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세상을 거울이라고 생각해왔다. 자신의 내면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도 어딘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믿음에 가까웠지만, 그는 늘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모습을 통해 지금 자신의 내적 상태를 점검하곤 했다. 거리의 풍경을 면밀히 살펴보거나 들리는 소리에 자세히 귀를 기울이는 건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러므로 자연이 무섭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자신의 내부에 두려움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지금 이 눈보라의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어둠이 내린 밤, 보이는 거라고는 그저 자신의 모습뿐인 칠흑 같은 창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아마도, 그 의미없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의미 없는 것들의 무자비함을. 이 무자비함의 그물에서 벗어나려면 사람은 자기 내면에 의미를 세워 자연을 해석해야만 한다. 그간 그가 읽은 시와 소설들은,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저도 모르게 쓰기 시작한 글들은 모두 그런 노력의 결과물들이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 무자비할 수밖에 없는 자연에 맞서기 위해 상징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정현이 평생 몰두해온 일이었다.
또한 그건 중학생들에게서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아야만 했던 섬 주민들의 일이기도 했다. 인터뷰 속에서 어떤 사람은 자신의 치부를 숨김없이 드러냈고, 어떤 사람은 이제 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무엇 하겠느냐며 입을 다물었다. 자연을 닮아 인생의 나날로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비와 눈과 바람 같은 일들이 느닷없이 벌어지곤 했다. 그때마다 그들은 그를듯한 이야기를 짜려는 소설가나 숨겨진 의미를 알아내 불가해한 것들을 상징으로 만들려는 시인처럼 자신의 인생사를 설명했다. 그건 손유미씨도 마찬가지였다. 정현은 손유미씨의 인터뷰를 읽으며 그녀가 맞닥뜨린, 거대한 푸른 벽과 같은 바다의 의미를 이해했고, 그녀가 그 바다 너머의 삶으로 나아갔음을 알게 됐다. 그녀는 중학생들에게 그 초월을 ‘세컨드 윈드’라는 체육 용어로 설명하고 있었다. 중학생들은 요즘 아이들답게 포털사이트의 지식백과에서 찾아낸 그 용어에 대한 설명을 인터뷰 옆에 붙여 놓았다.
세컨드 윈드
요약: 운동하는 중에 고통이 줄어들고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 상태.
제2차 정상상태라고도 한다. 운동 초반에는 호흡곤란, 가슴 통증, 두통 등 고통으로 인해 운동을 중지하고 싶은 느낌이 드는데 이 시점을 사점dead point이라고 한다. 이 사점이 지나면 고통이 줄어들고 흐흡이 순조로우며 운동을 계속할 의욕이 생기는데, 이 상태를 세컨드 윈드라고 한다. 숨막힘이 없어지고, 호흡이 깊어지며, 심장박동수도 안정되고, 부정맥도 없어지게 되어 힘차게 운동할 수 있게 된다. 속도가 빠를수록 일찍 나타난다. 이는 환기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누구나 운동하는 중에 경험하는 것이다.
대개 운동 초기의 호흡곤란으로부터 환기가 적응되고, 운동 초기에 산소 부족으로 생성된 락트산이 혈액의 흐름 증가 등으로 인해 산화되고 땀과 소변을 통해 제거되며 흐흡근에 적응하여 운동 초기의 피로에서 회복되기 때문에 일어난다. 또 한 가지는 초조 공포 등이 증가했다가 운동이 지속되는 동안 이런 현상들이 해소되므로 세컨드 윈드가 촉진된다.
셋째 날 아침, 창밖을 보니 세상이 온통 하얀색으로 덮여 있었다. 땅바닥뿐만 아니라 풍경도 전부 하얀색이었다. 완성한 풍경화 위에 흰 크레파스를 죽죽 그어대는 샘술쟁이 아이처럼 자연은 항구와 바다를 시야에서 지워버렸다. 그럼에도 정현은 그 하얀 풍경을 한참 쳐다봤다.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오전을 보낸 뒤, 그는 첫날 차를 타고 올라온 도로를 따라 학교까지 걸어갔다. 그가 묵는 펜션에서 봉우리만 넘어가면 학교가 나왔지만, 쌓인 눈 탓에 산길로 걸어갈 수는 없었다.
강연장인 도서실에 전교생이 앉아 있었으나 전교생이라고 해봐야 스무 명 남짓이었기 때문에 교실 하나를 다 채울 수도 없었다. 뒤쪽의 빈자리에는 교사와 학부모와 주민 들이 앉아 있었다. 아이들의 볼이 발그스레했다. 눈 구경하기 힘든 남쪽 고장이라 아침부터 아이들이 운동장에 모여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했다고 김선생이 정현에게 설명했다. 학교는 산중턱에 있어 교실 창으로 선착장과 방파제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눈을 밟으며 학교까지 걸어온 그에게는 도서실 안이 적당히 따뜻했지만, 아침부터 뛰어논 학생들은 노곤했으리라. 강연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는 강연 내용을 정리한 자료까지 프로젝트 화면에 띄워놓았지만 준비한 강연을 그쯤에서 그만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졸아서만은 아니었다. 갑자기 어떤 시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정현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제가 여러분 나이였을 때만 해도 21세기가 되면 세끼 식사 대신에 알약처럼 생긴 캡슐을 먹고, 귀찮은 집안일은 인공지능 로봇이 해결해주는 세상에서 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게 바뀌지 않네요. 아직도 꼬박꼬박 세끼 밥을 챙겨 먹어야 하고, 그러자면 돈을 벌어야 하고, 게다가 이제는 이렇게 마스크까지 쓰고 다녀야만 하니까요. 여러분이 살아갈 미래는 좀더 나아지기를 바라겠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힘든 일이 생길 때도 있을 거예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오늘이 생각나면 좋겠습니다. 코로나가 유행해서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던 그해 겨울, 섬에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서울에서 온 소설가가 이런 시를 읽어주었었지, 하고 기억해준다면 제가 무척 기쁠 겁니다.”
그리고 그는 일본 시인 미야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를 읽기 시작했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
욕심은 없고
절대로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웃고 있는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약간의 야채를 먹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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