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다시, 올리브](정연희 옮김), 문학동네, 2020.
(464~ 473쪽) 옮긴이의 말
[다시, 올리브]에서 ‘다시’라는 단어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리턴즈’를 붙이며 영웅인 주인공을 되살려내는 것과는 분명 그 느낌이 다르다. 여기서 주인공을 소환한 것은, 작가가 “올리브, 당신의 삶은 비록 허구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아니, 이미 독자의 마음으로 들어가 진짜 생명,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생명을 얻었으니 이미 허구가 아니로군요. 당신이 그 사이 살아온 시간, 그 시간에 대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대해 당신만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얼른 그 이야기를 들려줘요” 하고 말하는 것만 같다. [올리브 키터리지]에서 이미 노년기로 접어들었던 올리브는 [다시, 올리브]에서 노년기로 더욱 깊숙이 들어간다. 그러면서 언제나 얼마간 불편하게 느껴지게 늙어감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우리 눈앞에 더 가까이 당겨놓았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줄곧 다뤄오던 가난이나 폭력, 계급 같은 다른 불편한 주제도 여전히 등장한다(“분노와 권력이 발기를 가능하게 한다”라는 말이나 라킨 부부의 일화처럼). 그럼에도 이 소설의 가장 주된 주제는 늙어감과 죽음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올리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이야기, 십일 년 전에 자신의 존재를 이미 드러낸 올리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게 단순히 어떻게 늙어가고 죽어가는가에 국한되는 것일까? 우선 늙어간다는 사실에서 흔히 연상되는 것은 상실이다. 기억력도 잃어가고, 체력도 잃어가고, 머리숱도 줄고, 이미 품을 떠난 자식은 더욱 멀어지고, 부모나 친구, 배우자 등 가까운 사람도 하나둘 떠난다.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가 온다. 사실 상실은 우리가 세상에 나온 뒤부터, 이 시공간이 흐름에 던져진 그때부터 줄곧 경험하는 것이다. 노년이 되면 상실의 진행이 더 급박해지는 듯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실도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런 상실 중 간과할 수 없는, 어쩌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아마도 존재감일 것이다. 작가는 잭 케니슨의 이야기를 맨 앞에 배치했는데, 잭 케니슨이 가장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감정이 노년의 초입에 더욱 극심하게 느껴지는 존재감의 상실에 관한 것인 듯하다. 하지만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다. “누구도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지금은 다르게 다가왔다. (중략) 그 사실이 그를 거의 자유롭게 했다.” 올리브도 시인이 된 제자 앤드리아에게 그 비슷한 말을 한다.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는 말이야. 거기에 뭔가 자유를 주는 측면이 있지.”
상실이 자유를 불러온다는 그들의 말. 대단하지 않다는 건 자신이 축소된다는 의미이지만, 오히려 사회적인 허울을 벗고 어디로 가든 공기 방울처럼 가벼워져 자신으로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이어지는 앤드리아의 대답은 우리를 한층 더 깊은 성찰로 데려간다. “저는 선생님이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는 게 부러워요.” 애초에 대단하지 않았던 사람과 대단했던 사람이 모두 대단하지 않게 되는 평등의 시기, 노년, 어깨에, 목에 준 힘을 빼고 다녀도 되는 시기. 노년이란 어쩌면 잭처럼, 올리브처럼 자기도 모르게 욕설이 뱉어지는, 한껏 이완된 감각이 찾아오는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잃는 것뿐일까? 얻는 것도 있을까? 단연코 있다. 그리고 그 ‘얻는 것’의 다른 말은 곧 성장이 될 것이다. 식물은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줄기를 솟구친다. “잎을 벗은 나뭇가지는 움츠러드는 게 아니라 밖으로, 밖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성장은 깊어지기도 하고 커가기도 하고 뻗어나가기도 한다. 인본주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인간은 죽을 때까지 성장한다고 했는데, 올리브가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올리브 키터리지]와 [다시, 올리브]에서 올리브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는 인간을 보여준다. 관찰과 성찰을 통해, 올리브는 깨달아나가고 새로운 것을 얻어나간다. 그것은 겸허하고 숭고한 과정이다. 그러니 우리가 나이들어가면서 늙어간다는 말을 쓰는 대신 더욱 진하게 성장중이라고 말한다면, 내 정신의 성장판은 영원히 열려 있다고 말한다면, 내 삶은 더욱 멋있어지지 않을까?
우정과 사랑뿐 아니라, 노년이 맺는 여러 관계는 또다른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노년은 정리하는 시간만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시간이기도 하며, 더불어 관계의 특유한 변질을 경험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사람과, 변질은 사별에 의한 것이기도 하며(사별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관계의 질적 변화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혹은 관계의 정의나 성격 자체의 변화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내가 낳은 자식에게 배우자가 생겼다면, 내 아들이나 딸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엄마는 우리를 여기로 초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요.‘ ‘너는 초대할 필요는 없었어. 크리스, 너는 내 아들이야. 여긴 네 집이고.’ 그 순간 그의 얼굴색이 돌아왔다. ‘여긴 제 집이 아니에요.’“ 올리브와 며느리, 며느리가 데려온 아이들, 며느리가 아들과 낳은 아이들과의 관계도 순탄치가 않은데, 이 서걱거리고 삐걱거리는 관계는 올리브에게 자신에 대한, 자신의 양육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기회가 된다.
어떤 대상을 만나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는 인간 성장의 필수조건이며 핵심이다. 또한 내가 세상에 마음을 닫고 완전히 칩거해버리지 않는 한, 관계의 진공 상태에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설에서, 혹은 현실에서, 외로움이 너무 커져 계산대 종업원과 동전을 주고받으며 스치는 손에서 따뜻함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접하기도 한다. 우리는 진공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어떻게든 애를쓴다. 관계는 세상을 살아나갈 힘을 주고 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주니 어떤 형태의 관계든 중요하고 소중하다. 하지만 성찰의 능력, 자신의 영혼에 말을 거는 능력은, 모두 어느 정도 갖고 있겠지만, 누구나 동등한 정도로 갖지는 않은 것 같다. 이 말은 작가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확실히 그런 능력을 더 많이 가진 작가다. 그리고 그녀의 소설은 우리가 맺는 다양한 관계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낸다. 그것이 스트라우트의 매력, 우리가 그녀의 소설을 읽는 이유가 아닐까.
작가가 보여주는 죽음의 여러 모습, 가까운 죽음을 경험하며 느끼는 감정, 서서히 죽음이 당면한 내 것으로 느껴질 때 내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 올리브는 마지막이 다가오려 할 때,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자신의 기억을 타자하여 남기기 시작한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올리브는 개개의 기억에 머물지만, 그 순간은 자신을 더 이해하고 인간을 더 이해하는 순간이다. … 올리브는 죽음의 공포로 되돌아가더라도, 여전히 피어나는 봉오리를 보며 행복과 아름다움을 느낀다.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복탄력 공동체 (6) | 2023.11.02 |
---|---|
기후위기 시대, 희망의 티핑 포인트를 향하여 (0) | 2023.10.21 |
우리는 모두 미스터리다 (45) | 2023.10.06 |
세컨드 윈드 (32) | 2023.09.29 |
리스본의 밤에 듣는 파두의 매력 (29) | 2023.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