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통신

breaking news

이춘아 2019. 8. 8. 11:15


미국통신20 - breaking news

February 7, 2000

이춘아

 

 

 

지난 주 텔레비전 뉴스시간에 breaking news라는 자막이 두 번 나왔습니다. 한 번은 캘리포니아 앞 바다에 떨어진 알라스카 항공기 사고였고 또 한번은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난 화재였습니다. 긴급보도, 속보 등을 정규 방송 사이에 끼워 넣는 경우에 사용하는 영어단어가 breaking news 임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사고의 직접 해당자가 아닐 경우에는 아무리 큰 사고라 하더라도 지나가는 breaking news로 처리되곤 하는 경험을 개인적으로 자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 저녁 9시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난 화재는 처음에는 강 건너 불 보듯 하다가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닌 사건이 되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는 3층 연립형태로 총 24개 동에 386여 세대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화재가 난 그 날 저녁 텔레비전 소리를 크게 틀어놓아 뒤 늦게서야 불 자동차의 사이렌 소리가 가깝게 들리는 것을 알고 급히 밖에 나가 보니 아파트 주민들이 모두 나와 불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건너편 바로 옆 동 3층에서 불이 나고 있었는데 불 자동차가 물을 뿌리고 있어 금방 진압되리라 생각하고 너무 추워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화재가 난 동에는 16세대가 살고 있는데 그 중 한국교민 두 가족이 살고 있어 걱정을 했는데 불 구경갔다온 우리 집 아이의 정보 수집에 의하면 거주자들이 모두 빨리 대피해 인명 피해는 없다는 것과 그 동에 살고 있는 같은 반 아이는 화재 핑계로 숙제도 하지 않고 어쩌면 내일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좋아라 하고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참 아이다운 발상이라 생각하면서도 우리도 어릴 때 숙제가 많거나 시험이 있으면 학교에 불이라도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음을 떠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전달하는 우리 집 아이의 얼굴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신이 나고 흥분된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어렸을 때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겨울철이면 유달리 불이 자주 났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구슬 공장에서 불이 났는데 불 구경하러 갑자기 몰려든 동네사람들에다 구슬을 주우려고 몰려든 아이들, 도로가 좁아 소방차가 제대로 올라오지도 못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불길을 쳐다보았던 생각이 납니다.

 

미국 역시 평상시에는 동네 사람들 얼굴보기 힘들었는데 불이 났다고 하니까 주민들이 모두 나와 구경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담요를 두르고 나온 사람, 아예 두꺼운 잠바로 중무장하고 본격적으로 구경나온 사람, 개까지 데리고 나온 사람들, 거기다 취재하러 나온 방송사 등등 불난 집에 부채질하러 온 사람들 같아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불을 본다는 것은 두려움과 함께 경이로움으로 사람을 집중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날 따라 추운 밤이었는데 두 시간 가까이 불 구경하느라 사람들은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화재를 겪은 집들을 위해 적십자사에서 즉시 나와 필요한 생필품을 나누어주고 인근 호텔에 묵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우리 집 아이의 종합보고를 듣고는 안심하고 잘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 저녁 밥을 하다말고 갑자기 화재를 겪은 한국교민 집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잠은 호텔에서 잔다고 하더라도 밥은 어떻게 먹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가보았더니 그 집의 중학생 딸아이가 짐 더미 위에 쭈그리고 앉아 짐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화재가 난 위치의 바로 아래 층이라 집안이 온통 물난리를 겪어 몇가지 짐이라도 챙겨 옮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집 엄마는 젖은 옷가지, 탄내가 배어있는 이불가지 등을 빨래하러 가는 등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오리털 이불은 내가 손빨래해 줄 수 있다고 가져오면서 일손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달라는 말을 전하고 왔습니다.

 

그 다음 날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고 집안의 가재도구를 싸서 상자에 넣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이럴 일이 아니다 싶어 한국교민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건물이 붕괴될 수도 있으니 빨리 집을 비워달라는 요청에 집 주인은 급히 물건을 끄집어내고 몰려온 교인들의 덕분으로 무사히 빈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미국사회의 여러 가지 것들을 경험하였습니다. 화재, 토네이도 등의 재난이 일어나면 적십자사가 제일 먼저 나서서 구급품을 보급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는 기부금 공고가 나붙더군요. 아파트 단지내에, 신문지상을 통해 그리고 학교를 통해서도 안내장이 돌려졌습니다. 은행에 마련된 Fire Relief Fund 구좌로 기부해 달라는 내용으로.

 

그러나 정작 가장 필요한 일손은 없었습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측에서 몇몇이 나와 도와주기는 했지만 급히 가재도구를 옮기고 이사하는 일들은 온통 당사자들 몫이었습니다. 개미같이 부지런한 교포들이 몰려와서 이삿짐을 나르는 장면은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한 몫 거드느라 저도 힘깨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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