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수인 2], 문학동네, 2017.
83:
장마가 끝나면서 불볕더위가 시작되었다. 건자재의 재고가 떨어지는 때도 있었고 한여름이라 공사는 봄가을처럼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우리는 함바 빚이 늘어갔다. 모두들 ‘입이 무섭다’고들 말했다. 살아 있는 한 먹어야 하고 먹은 것들이 빚이 되어 쫓아오면 우리는 허우적거리며 온몸을 움직여 달아나야만 했다.
그 무렵의 신탄진 강은 아름다웠다. 우리는 저녁마다 그곳으로 씻으러 가서 어두워지기 시작한 강변의 숲과 거울처럼 잔잔해진 수면 위로 가끔씩 이곳저곳에서 물고기들이 튀어오르는 물소리와 작은 파문들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물속에 텀벙대며 들어가기가 아까운 순간이었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그늘에 앉아서 담배 한 대를 태우다 말고 대위가 나를 툭 치면서 저리로 가자고 이끌었다. “야, 우리 여기서 발르자.”
이 공사장에서 달아나자는 소리였다. 사실 두어 달은 쎄빠지게 일해야 장마 때와 한여름철 공사의 지체 때문에 밀린 빚 까고 겨우 차비나 손에 쥐고 떠날 판이었다.
“나야 뭐 괜찮지만 형님이 뒤탈 없겠어요? 다른 데 가도 호가 날 텐데.” 내가 그렇게 염려했지만 사정을 모르는 소리였다. “내 대충 두꺼비 십장한테 일러두었다. 자재 분실로 처리를 할 거야.” 그의 말에 의하면 십장들은 평소에 믿을 만한 일꾼들을 보아두었다가 시멘트나 철근 같은 건자재를 빼돌리고는 떠나는 놈에게 분실 책임을 씌운다고 했다. 함바 빚이 있는 노무자에게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대위와 나는 오후 휴식시간에 서로 눈짓으로 일터를 빠져나와 우리 방으로 가서 짐을 싸두었다. 그러고는 잠자리에 쓰던 담요만 방에 남겨두고 짐들은 함바 뒤의 풀숲에 던져두었다. 그래도 저녁은 먹고 떠나야 하니까 남들보다 먼저 천막 식당에 들어가 앉았는데 두꺼비가 대위를 슬쩍 불렀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한참이나 쑥덕거렸다. 찬물에 더운밥 말아서 짜디짠 간고등어조림과 열무김치로 저녁을 근사하게 먹고 담배까지 한 대 태웠다. 이제 방안의 담요를 걷어다 떠나야 할 판인데 대위가 강변에 나가서 소주나 한장하자고 했다. 그는 무언가 시간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85:
대위와 나는 강을 따라서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개구리와 맹꽁이 우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미호천을 따라 청주까지 가던 길은 훨씬 나중인 1970년대에 발표한 단편소설 [삼포 가는 길]의 배경이 되었다. 이것은 근대화 바람에 내몰린 사람들이 꿈꾸었던 추억과 상상 속의 공동체란 이제는 지상의 아무데도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황량한 이야기다. 주위는 별도 없이 캄캄했다. 대위와 나는 철교를 건너고 서평리에서부터 강변을 따라 나란히 뻗어나간 들길을 걸었다. 군화 틈으로 빗물이 새어들었는지 발바닥이 양말과 함께 철썩 달라붙었다. 가끔씩 저멀리 화물열차가 기적을 울리면서 지나갔다. 마을의 불빛들도 꺼져가고 밤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로 지척에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왔다. 나는 지금도 이 부근 마을의 예쁜 이름들을 기억하고 있다. 섬뜸, 달여울, 다락골, 그리고 강내면, 샘골 등등……
87:
“여기 좀 앉으슈.” 그는 부엌의 아내에게 뭔가 이르고 돌아와 우리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대위가 우리는 공사장 따라서 일 다닌다고 얘기했고 부근에 무슨 공사 벌어진 곳이 없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 농가에서 아침을 얻어먹게 되었는데 미호천 맑은 물에서 아낙네들이 건져올린 올갱이에 푸성귀 넣고 된장 풀어 끓인 국이 얼마나 맛있던지 염치 불고하고 두 그릇이나 비웠다. 고추장찌개며 가지나물과 호박나물은 그 댁 아낙의 얌전하던 모습처럼 깔끔했다. 중학교 학생인듯한 소년이 무릎 꿇고 우리 앞에 단정히 앉아 겸상에 아침밤을 같이 먹었다. 아침을 얻어먹고 나서 대위는 충북도청에 들러서 공사판이 어디에 벌어져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계절이 가을이라면 이런 중농의 집에서 한철 추수라도 거들면서 그 올갱이국을 원 없이 먹고 싶었다. 청주 시내까지 외길 철도가 있고 열차가 운행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수십 리를 다시 걸어서 중심가로 들어갔다. 무심천 건너 우암산 아래 자락이 중심가인 셈이었다. 대위가 도청에 들어가서 알아보고 나오더니 올해에 충북에는 큰 공사가 없고 전북에 간척지 공사판이 크게 벌어져있다고 했다.
대위와 나는 시장 모퉁이에서 그럴듯한 선술집을 발견하고 점심 요기나 하려고 찾아들었다. 아주머니가 연탄불 위에 민물새우찌개를 끓이고 있어서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키고 시원한 새우찌개를 안주로 을씨년스러운 날궂이 풀이를 했다. 나무탁자에 긴 나무의자를 놓았고, 한길 쪽으로는 유리문이 달린 전형적인 소도시 주막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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