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통신

한국에서 온 유품

이춘아 2019. 8. 8. 12:21


미국통신28 - 한국에서 온 유품

April 24, 2000

이춘아

 

 

부활주일 직전 금요일인 421일을 미국은 Good Friday라고 하고 휴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부활절에는 “Happy Ester!” 하며 서로 인사를 주고 받습니다. 크리스마스에는 “Merry Christmas!” <merry> <happy> 의 차이는 무엇일까 숙제로 남겨두었습니다.

 

지난 금요일 알라바마주에 살고있는 남편의 대학 스승의 집을 찾아갔다가 뜻밖에도 윤치호가 제 마음에 다시 살아나는 신기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교회사연구가인 남편이 테네시 내쉬빌에 오자마자 첫 자료수집한 사람이 윤치호였고 이를 정리하여 한인교회 회보에 [내쉬빌의 첫 한국인, 윤치호]라는 글로 소개했을 때만 해도 윤치호는 제게 역사속의 한 인물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선교사이자 남편의 스승이었던 C.D.Stokes(한국이름 도익서)박사의 집에서 우연히 보게된 사진에서 윤치호라는 인물이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게 됐습니다.

 

윤치호라는 인물에 대해 미리 글을 읽어서이기도 하지만 선명하게 잘 찍은 인물사진을 통해 갑자기 아 그랬었구나하는 느낌을 받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잘 찍은 사진이었고 일제시대의 고뇌하는 지식인의 얼굴이 그의 성격과 더불어 아주 잘 표현된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은 1900년대 초반 한국인 선교사가 찍었던 사진첩 가운데 있었습니다.

 

1900년 초반 한국의 풍습을 잘 보여주는 사진첩이었는데 다른 사진들이 2*3정도의 사이즈였다면 유독 윤치호의 사진만 4*5 사이즈 크기로 뽑았습니다. 물론 흑백사진입니다. 사진을 찍었던 선교사의 생각에도 윤치호라는 인물이 작품상으로도 아주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되었던 모양입니다. 윤치호는 1864년에 태어나신 분으로 추측컨대 그 사진은 사십대의 인물로 보입니다.

 

남편의 스승인 도익서 박사님은 2년전에 돌아가셨지만 부인은 살아계셔서 역사적인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계셨습니다. 그 부인 역시 1954년 한국 선교사로 와서 30여년간을 한국에서 일을 하신 분이었습니다. 본인은 미국에 와서 한국말을 많이 잊어버렸다고는 하나 여전히 한국말을 잘 하십니다. 미국인과 이렇게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다니 감격스럽기까지 하더군요.

 

1915년에 태어난 도익서 박사님의 부친 역시 한국 초대 선교사로 도익서 박사님은 어려서부터 한국에서 살았고 고등학교까지는 한국에 있다가 대학공부를 미국에서 한후 박사학위까지 받고 한국으로 다시 귀국하여 68세에 은퇴할 때까지 한국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역시 한국에서 태어났으니까 3대가 한국과 깊은 관련을 맺은셈입니다.

 

우리는 전쟁으로 많은 역사적인 유물을 잊어버렸으나 선교사님들을 통해 이렇게 우연찮게 한국의 귀한 역사적 자료를 접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익서 박사님의 아버지께서 1900년 초반의 자료를 많이 가지고 계셨으나 은퇴하신후 미국에서 살던 집이 해변가에 있었는데 갑작스런 해일로 많은 자료를 잊어버리셨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집에는 제가 너무도 신기해 하는 한국의 유물들이 많아 제가 그 집을 박물관이라고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감격해 마지 않았던 그 사진첩은 한지로 제책한 것으로 한지 위에 사진들을 붙여놓았는데 책으로 3권이었습니다. 남편은 그 사진 밑에 설명이 없어 기록적인 가치가 떨어져 아쉬워했습니다. 도익서 박사님의 부인 말로는 그 사진첩 역시 다른 선교사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1930년 원산 루시여학교의 졸업앨범도 보았습니다. 당시 루시여학교의 교장 선생님이었던 Oliver(한국이름 오 리부) 선교사님의 유물이었습니다.

 

또 하나 신기했던 것은 도익서 박사님 가족이 한국 대천 바닷가에서 모은 조개껍질이었습니다. 아들이 대천 바닷가에서 조개를 주어와 관심을 갖더니 25개의 조개명을 알아오더랍니다. 그 뒤로 온 가족이 조개껍질 모으기에 주력하여 미국에 가져온 조개껍질만 해도 큰상자로 3상자입니다. 형태별로 분류하여 아예 설합도 만들어두었고 멋있어 보이는 껍집은 진열장에 넣어 두었습니다.

 

조개껍질을 모은다는 소문이 나니까 어느 선교사님의 부인이 자신이 만든 한국 대천 바닷가 조개껍질에 관한 조사자료를 선물로 주셨다고 합니다. 그것 역시 어느 생물학자가 만든 책 못지 않은 자료집이었습니다. 조개 하나하나를 마치 사진찍듯이 그려놓은 것에다 영어로 그 조개에 대한 설명을 해 두었습니다. 그 자료집 역시 두권이었습니다.

 

미국에와서 가장 한국적인 유품들을 보게 되니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한국을 다양하고도 자세하게 기록하였고 그리고 사랑하였던 같습니다.

 

다음의 글은 윤치호에 대해 쓴 제 남편의 글입니다. 참고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내쉬빌의 첫 한국인, 윤치호

 

윤치호(1864 - 1945)는 개화 사상가로, 감리교 지도자로 한국사회와 교회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888년부터 3년동안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쉬빌에 거주하면서 밴더빌트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내쉬빌과 밴더빌트대학은 젊은 시절의 윤치호를 한국사회의 지도자로 양육시킨 곳일 뿐만 아니라 조국에 대한 봉사와 선교를 다짐하게 해준 곳이기도 하다.

윤치호는 십대 중반 이후 이십대 후반까지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가족과 떨어져 일본, 중국, 그리고 미국에서 보냈다. 그는 188116세의 나이에 조선정부의 사절단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 남아 일어와 영어를 익혔으며, 18835월 초대 주한 미국 공사의 통역관으로 귀국했다가 18851월 이후에는 중국에 가서 상해에 있는 감리교대학 중서서원에서 3년 동안 공부하였다.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시기에 윤치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기독교인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중서서원에서 일하던 선교사들의 도움과 권유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났다.

윤치호가 중국을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8881026일 그의 나이 스물 세살 되던 해 가을이었다. 미국의 첫 인상은 전일 꿈에도 못 본 바” “도로와 가옥의 굉장함이었다. 기차를 갈아타면서 덴버, 캔사스 시티, 한니발, 세인트 루이스를 거쳐 최종 목적지인 내쉬빌에 도착한 것은 114일 밤이었다. 그는 첫 날을 얼윈하우스에서 머물고, 다음 날 밴더빌트의 호스 교수를 만나 입학을 상의하고 밴더빌트대학 기숙사에 입사하였다. 그후 그는 밴더빌트대학 신학과 특별학생’(special student)의 신분으로 1891년 여름까지 3년 가까이 내쉬빌에서 생활하였다.

윤치호는 밴더빌트대학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신학과에서 조직신학, 설교학, 성서 역사, 교회사, 목회학, 감리교회사, 감리교교회법, 연설학 같은 과목을 공부하였다. 그는 내쉬빌에 오기 전 일본과 중국에서 영어를 익혔기 때문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런 과목들을 공부하고 성적도 다른 미국 학생들보다 우수했으나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교리체계를 공부하는 조직신학 수업에 애를 먹었으며, 내용의 파악이나 의미보다는 많은 양의 독서를 요구하는 조직신학 담당 교수 틸렛트 박사의 교수 방법도 싫어하였다. 윤치호는 일기에서 교황이나 다른 신학자들의 복잡한 이론과 도그마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은 신학이라고 쓸 정도로 조직신학 과목에 흥미를 갖지 못했지만, 틸레트 교수에게 제출한 페이퍼가 그의 주선으로 감리교 정기간행물인 웨슬리안 크리스쳔 애드보케이트(Wesleyan Christian Advocate)에 실리기도 하였다. 그는 신학 수업과 함께 다른 과에서 수학, 물리학, 화학, 영어, 라틴어, 독어, 역사, 경제학 같은 과목을 공부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서양사 공부에 흥미를 가져 틈이 나면 기본(Gibbon)로마제국의 쇠퇴와 몰락을 즐겨 읽었다.

밴더빌트에서 공부하는 동안 윤치호는 줄곧 감리교회인 웨스트 엔드 교회(West End Church)에 나갔다. 정기적으로 주일 낮 예배와 주일 저녁 예배에 참석하였으며, 때로는 감리교회나 장로교회, 성공회, YMCA 등에서 초대받아 자신의 입교 과정, 한국, 일본, 중국의 선교상황 등을 들려주기도 하였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는 끊임없이 온전한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구했는데, 그의 일기에는 주 예수님, 완전히 온전하기를 간구합니다라는 기도가 들어 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이 절반 신자로 머무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윤치호의 유학 생활은 수업료가 면제되고 학기 중에는 숙식비가 제공되기는 하였으나 용돈이 없었으며, 방학이 되면 숙식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그의 집안은 부유했으나 고국으로부터 송금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학교 잔디밭의 풀 뽑는 일과 청소 일을 하는가 하면, 그 일마저 없을 때는 감리교 출판사에서 찬송가를 구해 무더운 여름에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판매하는 일을 하기도 하였으나 실적은 극히 저조하였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이름을 밝히지 않는 한 여성이 교수를 통해 가끔 15, 20불씩 그를 도와주었으며 그 돈은 밴더빌트 재학 동안 모두 85불에 이르렀다. 졸업 무렵 그는 자신을 도와 준 여성이 백스터 부인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 후의에 감사하여 밴더빌트를 떠날 때는 조그만 감사의 표시로 그가 가지고 있던 반지 하나를 백스터 부인에게 선물로 주었다.

한 한국인 유학생의 애환은 돈 문제뿐만 아니라 외로운 생활에서도 보인다. 소식을 알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저녁 무렵이면 찾아 드는 한 이방인의 외로움과 우울이 그의 내쉬빌 생활을 힘들게 했으며, 그럴 때마다 그의 심정을 나눌 수 있는 어머니나 누이 같은 여자 친구가 있기를 염원하기도 했다. “내 심사는 사랑과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사람 - 어머니나 누이 - 을 갈망한다. 친절하고 공감할 수 있는 여자 친구가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머니나 누이 같은 그의 가슴속에 나의 소망과 두려움, 슬픔과 기쁨을 털어놓고 싶다.” 경제적 어려움과 외로움이 그의 내쉬빌 생활을 힘들게 했지만, 간혹 중국인으로 오해받아 인종적인 모욕을 당하기도 했으며 건강도 좋지 못했다. 내쉬빌에 와서 초기에는 거의 날마다 계속되는 몽설에 약까지 먹어야 했으며, 두통에 시달릴 때마다 그의 부친의 건강을 부러워하였다.

그의 일기는 19세기 후반 내쉬빌의 모습도 전해 준다. 1889년 당시 내쉬빌 인구가 72천여 명이고, 11개의 은행, 26개의 학교, 그리고 31개의 교회가 있으며 내쉬빌 인구의 1/6만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그가 188811월 내쉬빌 교도소를 방문했을 때, 6백여 명의 죄수들이 수감되어 있었으며, 주일마다 교인 삼십여 명이 교도소에 찾아가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며 특히 병있는 자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윤치호가 내쉬빌에서 발견한 미국사회는 중국인과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인들이 인간의 평등, 자유, 우애를 많이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는 백인들만이 이것을 누리고 있다고 보았다. 서부 지역에서의 중국인 박해, 남부에서의 흑인 취급, 그리고 미국 전역에서의 인디안들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를 보면, 미국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는 것이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윤치호는 내쉬빌에 체류하면서도 조국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의 조국애는 188812월 그의 선생 집에 일본 학생과 함께 초대받았을 때의 일기에 는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일본 칭찬이 자자하니 나는 내 나라를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고 다만 흉잡힐 일만 많으매 일변 한심하며 일변 일본이 부러워 못견디 것도다. 그러나 내 팔자 이미 조선사람 되어 한심하여도 쓸데없고 탄식 통곡하여도 무익하매 아무쪼록 상제(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내 평생을 아국 좋은 일에 진심갈력하여 비록 내 생전에 내 나라가 남 나라같이 번성하는 것을 못 볼 지라도 내 마음껏 내 나라를 섬기는 것이 내 직분이라. 상제는 나의 약한 것을 도와주시니 내 일생이 예수성국(耶蘇聖國)과 내 나라에 유용하게 지도하여 주시옵소서.” 이처럼 그는 어려움에 처한 그의 조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새로 건설되는 거룩한 나라가 되기를 염원했으며, 18893월에는 미국교회 신문을 통해 고국교회의 소식을 접하고서 아국 경성의 신교형제가 이미 백여인이라 하니 반갑고 그 전교 신속한 일 신기하도다. 아무쪼록 하늘이 도와 아국 전교 거침없어 속히 성교국이 되기를기도하였다.

윤치호는 이처럼 조국의 갱생과 발전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조국의 현재와 장래를 비관적으로 보았다. 조국의 과거나 현실은 윤치호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주지 못했으며, 그래서 미국 사람들로부터 한국 이야기를 부탁 받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가련한 코리아! 이 나라는 좋은 나라요 풍부한 나라인데 미개한 백성의 정부 하에서 가난하고 멸시 당하고 있다. 조선정부가 국민 교육을 소홀히 하는 한, 조선이 현상태로부터 구원받을 전망은 없다.”

이처럼 윤치호는 내쉬빌에서 공부하는 동안 교육과 기독교만이 조국을 갱생시킬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런 생각은 귀국해서 독립협회와 그가 개성에 설립한 학교 한영서원을 통해 국민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토대가 되었다.

1891617일 윤치호는 우수에 찬 밴더빌트에서의 학업을 마치고 좀더 공부하기 위해 에머리대학으로 떠났다. 현재 밴더빌트대학에는 그의 성적부와 졸업후 학교측과 교환한 편지 몇 통만이 남아 있다. 그는 내쉬빌에 체류하는 동안 영어로 일기를 썼는데, 그의 내쉬빌 생활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그 일기 속에만 남아 있는 셈이다. 19231월 내쉬빌 신문 The Nashville Banner, 그 무렵 밴더빌트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그의 딸 헬렌을 소개하면서 윤치호가 귀국후 한국사회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하고 있다. (김흥수 - 목원대학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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