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통신36 - 미국인 스승
July 11, 2000
이춘아
미국에 와있는 동안 미국인 스승을 네 분 만났습니다. 네 분 가운데 세 분은 남편의 스승이고 한 분은 제 스승입니다. ‘스승’이란 표현을 간혹합니다만 글로 쓰고 보니 어색합니다. 그래서 국어 사전을 찾아보니 분명 순수 우리말로 [자기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나를 가르쳐준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유달리 과외가 많았던 우리였기에 과외선생님까지 포함하면 정말이지 한 반을 구성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내 입으로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몇 명이나 될까요. 그런데 이 나이에 귀한 스승을 모시게 되었는데 그것도 우리와 국적을 달리한 스승입니다.
이들 네 분의 스승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미국인이란 점, 둘째 은퇴하시고 70?대라는 점, 셋째 인터넷 교류가 원활하다는 점, 넷째 인종을 넘어선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제 스승에 대해 우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외국인들을 위한 영어수업을 다녔었습니다. 외국이민자들의 영어습득을 위해 무료로 실시되고 있는 ESL(English for Second Language) course입니다. 일주일에 2회씩 했었지요. 나름대로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우리반을 가르키고 있던 선생님이 집안 일로 휴가를 내고 임시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그 임시 선생님이 바로 저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스무명이 넘었던 우리 반 학생들은 이런 저런 일로 떨어져나가고 6-7명만이 남아 수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임시선생님이 오시면서 우리 반은 활력이 넘쳐났습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속으로만 좋아했지 표현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멕시코출신의 한 학생이 당당하게 말하더군요. 수업방식이 너무 좋다고. 원래 선생님이 복귀하시자 그 멕시코 출신의 학생은 수업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저 역시 수업에 더 이상 가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참고 지내면 개근상은 받을 수 있었을 터이지만(사실 개근상은 없습니다) 중도에서 그만두었습니다. 명분인즉 나 스스로 용서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열심히 가르치지 않았던 사람도 선생은 선생이라고 생각해 왔던 제 마음에 쇄기를 박기위함입니다.
진정한 가르침이란 어떤 것인지 많이 생각했습니다. 설명을 위한 비교가 불가피하기에 비교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원래 선생님은 자기가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시간을 끌어서라도 진행을 합니다. 때로는 한 주제로 4-5회 이상을 합니다. 처음에는 그 방법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한 주제라도 우리 머리에 깊이 새겨지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깊이 새겨진 배움보다는 질렸다, 지겹다는 느낌이 우선 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시 선생님의 90분간 수업진행이 이러했습니다. 첫시작은 음악입니다. 올드패션의 그러나 미국문화가 담긴 컨츄리음악을 들려줍니다. 반드시 시디 겉장을 돌려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가사를 직접 타이핑한 것을 프린트하여 나누어주고 읽히고 설명하여 줍니다. 그 다음 또 선생님이 직접 타이핑해온 좋은 글을 읽히고 설명해주고 문법책도 조금씩 진행하고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시간은 짧았지만 많은 타이핑자료를 받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신문을 읽다 이해되지 않는 용어를 질문하면 막힘없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누구나 골고루 돌아가며 말할 수 있도록 아이스케익 막대기 같은 것에다 이름을 써서 그것을 깡통에 넣은 후 하나씩 꺼내 질문하고 다시 반복하는 등의 방식도 섬세한 배려가 없으면 쉽지 않은 것입니다. 상식 또한 풍부한 분이라 중구난방의 어순도 맞지 않는 질문에도 빠르게 간파해서 설명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거의 완벽한 가르침. 그 비결의 핵심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 아! 하고 느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활력이라고 하는 것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어린아이처럼 말하라고 강조합니다. 중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셨습니다. 머리 굴리지 말라고.
그 분을 통해 우리는 ‘할 수 있다’ 라는 느낌을 은연중에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다른 모임에도 참가해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나의 생활도 즐거웠습니다. 내가 배우고 있다는 느낌,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느낌입니다.
그러한 느낌으로 충만되어 있을 때 원래 선생님이 복귀하여 가르치자 이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강한 불만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수업에 다시는 가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로서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나 역시 내 방식을 우격다짐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지루해하는 표정을 묵살하면서 ‘하면 좋은거야’. 이런 식으로. 그러나 내가 직접 경험하고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가르침은 우선 즐거워야 하고 아이를 학생을 인정해주고 조금 잘한 것도 진정으로 잘 했다고 칭찬해주고 생각을 많이하고 준비를 많이해온 수업만이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그렇게 될 때만이 배움이 즐겁고 충만한 느낌이 차오르게 된다고.
그 임시 선생님은 외국인을 위한 책읽기 모임을 만들어 매달 한번씩 선생님집에서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번씩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들이 몇권이 됩니다. 그 가운데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 있습니다. 그 책 가운데 spiritual guide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제가 한 말 했지요. 선생님이 저의 spiritual guides 가운데 한 분이시라고. 쑥스러워하시더군요. 외과의사로 은퇴하신 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계신데 특히 우리같은 학생들을 대상으로한 교육을 하고 싶어 ESL교사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하고 계십니다. 의사였을 때 환자 입장에서 보면 정말 좋은 의사였을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선생님은 우스개 소리를 하십니다. 65세가 넘으니까 주립대학에서 어느 강좌나 무료로 배울 수 있어 좋다고. 스페인어도 그렇게해서 한 강좌 배우고 있는데 요즘 스페인어판 해리포터를 줄쳐가며 열심히 읽고 계십니다. 그 부인 역시 불어를 배우고 있는데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함께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나머지 세 분의 스승은 남편의 스승이었지만 그 분들을 만나뵈면서 나의 스승이 된 것같은 착각이 드는 분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분은 십년전 부부 동반하여 한국을 방문했었고 오년전 저희가 그분이 계신 학교를 방문하여 만나뵈었다가 오년 후인 올해 다시 만나뵈었습니다. 거의 78세에 학교를 은퇴하시고 자신의 고향인 버지니아에 집을 마련하여 살고 계셨습니다. 십여년전 휠체어에 부인을 모시고 한국에 오셨을 때만 해도 정정하셨는데 이제는 그 선생님마저 지팡이를 짚고 계셔서 마음이 짜안해지더군요. 그래도 나다니실 때는 휠체어에서 자동차로 부인을 옮기고 트렁크에 휠체어를 접어넣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선생님과 헤어지면서 처음으로 포옹하면서 하는 인사를 했습니다. 십년전 오년전 그리고 올해 이제 다시 만나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나왔습니다.
또다른 두분의 스승은 한국에서 30여년간 선교사로 계셨던 분이십니다. 알라바마에 살고 계신 스승의 집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마침 우리가 갔을 때 딸 가족이 와 있었습니다. 1954년생인 그 딸은 한국인 혼혈아로 입양한 딸입니다. 두 딸을 입양했는데 그 중 한 명입니다. 현재 남미의 콜롬비아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자녀를 둔 행복한 가정입니다. 한국인 혼혈이라 하여 어디 한국인의 흔적이 있을까 아무리 보아도 오히려 남미 사람같아만 보입니다. 그러다 설거지 하는 뒷모습을 우연히 본 순간 앗! 무시 다리. 쭉 뻗은 다리가 아닌 저처럼 굵다랐게 휜다리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으로 한국인의 흔적을 마지못해 확인해 보았습니다. 고등학교까지 한국에서 다녀서인지 그 남편 하는말 아침에도 점심에도 김치 줄 때가 있다고.
알라바마 옆의 미시시피주에 살고 계신 한 스승을 방문했습니다. 그 분은 1949년에 한국선교사로 와서 30여년간을 한국에서 사셨는데 사진찍는 것이 취미인지 본업인지 모를정도로 기록사진을 많이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방문한 목적도 그 선생님이 갖고 계신 사진자료를 수집해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전후의 한국 모습을 슬라이드로, 사진으로 보았습니다. 외국인의 눈에 신기한 모습이었을 정경이 오늘의 제 눈에도 신기하게 보입니다. 아름다운 한국의 모습들. 미국에서 보는 한국은 이국적입니다. 아름다운 내 나라, 전쟁으로 파손되어 폐허가 된 땅 그곳도 내 나라입니다.
요즘 그 선생님이 하고 계신 일은 마당에 새 모이를 뿌려놓고 새 사진을 찍는 일입니다. 사람이 다가가면 새가 날아가 버리니까 카메라를 마당에 세워놓고 줄을 집안으로 연결하여 순간을 포착하고 셔터를 누르는 것입니다. 작년에 사진찍는 것을 배워 수동식 사진기로 한창 사진찍는데 열을내는 터라 그 분이 갖고 있는 카메라들이 부러웠습니다. 50년 넘는 경력의 소유자를 스승으로 모시지 않을 수 없지요. 어떤 슬라이드는 스캔으로 받아 큰 사이즈로 프린트해 주셔서 감탄했습니다. 그 선생님 집앞에서 자동셔터로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그 다음 날 집에 도착하니 이메일로 기념사진을 전송해주시고 우편으로도 보내주셨습니다. 사진 뒷면에는 일시, 장소 등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역시 전문가는 달라.
세상사는 재미는 좋은 것 구경하는 것도 있겠지만 역시 사람을 알게 되고 아는 수준을 넘어서서 나의 스승으로 모시기도 하고 그런 재미가 가장 좋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