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통신39 - 이삿짐을 싸다
August 4, 2000
이춘아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닷새 남겨 두고 있습니다. 며칠 전 그 동안 지니고 살던 짐을 부치고 이제 홀가분하게 마지막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짐을 덜어내어 홀가분하다고는 하나 정신적으로 홀가분한 것은 아닙니다. 못다한 인간관계를 마무리짓기 위해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다보면 왜 진작 이런 시간을 일찍 갖지 못했어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을 떠나오기 직전 있었던 일련의 행사가 이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저희 집 아이가 그저께 친구의 편지를 받아보더니 그 친구에게 전화하고 싶다하여 전화하고 나서는 조금 있다가 다시 그 친구가 보고 싶다고 합니다. 사람은 글을 받아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어하고 다음 순서는 얼굴을 보고 만져보아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때가 되었는지 저도 가족들이, 친구들이 보고 싶어지던 차였습니다.
저희 집 아이가 가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처음 미국 왔을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미국 도착 첫날 밤 시차적응이 어려웠는지 잠이 오질 않아 일어나 라면 끊여먹고 누워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었던 그 날이 참 좋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예고는 신선했었습니다. 밤이 되었지만 잠도 잘 오지 않고 들떠 있는 것 같은 기분. 오래 전 친구와 여행을 떠나 여관방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과도 같은 그런 기분. 그런 긴장감을 항상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늘 신선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일년을 결산해 봅니다. 때로는 톡투미에 미국통신을 올리기 위해 내가 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글 쓸 거리를 궁리하고 있었던 나를 떠 올려봅니다. 그러다 보니 무엇을 보고 듣던지 그것은 나의 취재대상이 되고 있었음을 뒤늦게 느끼기도 했습니다. 부담없는 즐거운 글쓰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에게 부담을 주거나 공적인 책임이 전가되는 글쓰기보다는 과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쓰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를 찾아서 쓰고 싶었습니다. 내 친구에게 쓰고 싶었던 것을 썼습니다. 친구들 모두에게 일일이 소식 전하지 못하지만 어쩌다 친구들이 내 소식이 궁금해지면 톡투미로 들어와 내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하는 그런 심정으로 썼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새겨둘 것은 제가 경험했던 이야기들이 그냥 이야기 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진 경험과도 같아 사실보도라도 하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많습니다. 잠깐 스쳐지나가는 경험과 느낌의 미확인 보도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쉬운대로 미국통신을 여기서 마감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과 ‘goodbye'
미국생활 1년을 마감하는 시점에 와서 각별했던 일년을 정리할 수 있는 단어가 어떤 것일까 생각하던 중 <안녕과 goodbye>가 떠 올랐습니다. 한국의 네 살박이 아이도 굳바이가 뭐할 때 사용하는 단어인지 알고 있을 정도로 굳바이는 세계통용어가 되어있습니다만 안녕과 goodbye 사이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문화적 표현의 벽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가를 미국생활 일년을 통해 더욱 절실히 느끼고 떠납니다. 또 그 벽을 굳이 뛰어넘으려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느낀 것도 소득입니다.
중학교 일학년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영어로 인한 시비는 끊임없이 이어져 나는 왜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가를 둘러싼 개인적인 능력에서부터 언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민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미국생활 일년이 주어지면서 이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해 보리라 장담했던 것인데 휘딱 일년이 지나버렸습니다. 6개월정도 지나야 영어가 들리기 시작한다는 경험자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6개월을 줄여보리라 했던 것입니다. 과연 4개월 접어들던 때에 텔레비전의 영어가 들린다고 식구들에게 자랑했습니다. 몇 퍼센트가 들립니까가 영어 선생님의 질문이었는데 그 때 나는 70% 정도, 그러나 속으로는 90% 정도는 들리는 것 같았는데 라고 생각했지요.
그 4개월에서 시간이 지나 일년이 된 시점에서 그 퍼센트는 15%로 줄어들었습니다. 정말은 7%는 되는지가 의문입니다. 그 퍼센트를 인정하게 된 때는 두달 전 미국인 목사님이 오셔서 영어설교를 하셨을 때입니다. 설교하기 전에 번역문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저는 설교문을 대조하면서 들을 것이 아니라 듣기만 해보자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이 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얼추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만 집에 와서 번역된 설교문을 읽는 순간 아! 이럴수가. 그 설교문에는 들리지 않았던 다양한 단어와 표현, 목사님의 감정이 섬세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때로는 나는 왜 이렇게 영어단어를 많이 알고 있지? 나는 왜 이렇게 미국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렇게도 많은 시간을 들여 영어사전을 뒤적이며 외우고 쓰고 했는데 그것은 생활속의 단어를 찾은 것이 아니라 영어단어에 해당하는 한국어 단어를 대조하여 익히는 방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영어와 한국어의 언어 어순이 달라 어렵다고들 합니다만 이제와서야 깨달은 것은 사전을 찾아 명사 단어 익히는 것도 우선 중요하겠지만 문화적인 배경이 담겨있는 형용사, 동사가 언어의 관건임을 알게 됬습니다. 언어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의 경우 선천적으로 빨리 습득합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와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중요한지를 깨닫는데 까지는 왔습니다만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언어가 사용하고 있는 그 형용사와 부사, 동사들을 익혀온 문화권과 상황이 서로 다른데 그 미묘한 뉘앙스를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려서 익혀왔던 그 표현들, 어려서 먹어던 그 음식 맛, 체질로 스며든 것을 미국생활 30년이 지난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이 곳에와서 보면서 확인해 봅니다.
저의 결론은 이러합니다. 영어습득을 마치 내 언어를 습득하듯 살아온 우리의 관행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한국은 미국의 속국처럼 살아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달나달해진 영어사전을 자랑해 왔었고 국어사전은 제대로 찾아보지도 못해 왔던 것을 반성해 봅니다. 얼마전 단어를 확인해 보기 위해 국어사전을 들여다 보다가 그 다양한 우리말의 어휘들이 새삼 얼마나 좋은가를 느꼈습니다.
영어배우기는 제2외국어에 해당하는 것임을 다시 주지해 봅니다. 영어를 마치 국어와 대등한 것에 순위를 두고 나 스스로를, 그것도 모자라 내 아이들을 쪼여들게 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임을 새겨봅니다. 영어를 국제화된 세계에서 필수적인 생활언어로 배울수는 있으되 영어못해 사람을 바보취급시하는 관행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전히 어쩌면 더욱 강하게 내 아이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영어를 가르치려하고 습득하려 할 것입니다만 전처럼 마치 영어 못하면 안된다는 입장은 바뀔 것입니다. 영어배우기는 생존의 선택이지 필수는 아님을 확고히 하고 미국을 떠납니다. 국어, 영어, 수학 ‘공통필수’의 입시 지옥에서 이제야 벗어나는 것 같습니다. 한평생 지녀온 막막한 영어배우기에 대한 부담은 이것으로 이만 끝.
정말이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무엇을 좇아가며 살아가는 것인가요.
끝없이 우리를 올가메었던 것들을 하나씩 정리해 보는 것이 이렇게도 힘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