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통신

교회 생활

이춘아 2019. 8. 6. 07:44


미국통신 3 교회 생활

September 26, 1999

이춘아

 

지난 토요일인 925일 이곳 테네시주립박물관을 다녀왔습니다. 테네시의 역사는 곧 200여년의 미국역사임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큰 정치적 줄거리는 전쟁입니다. 아메리칸 토착민과의 전쟁, 아메리칸 정착민과 영국과의 전쟁, 그 전쟁들위에 민주주의가 자리잡았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흑백간의 갈등이나 노예들의 삶은 이 박물관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피하고 싶은 역사적 갈등이나 묵과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집안 살림의 중요한 작품으로 퀼트가 있습니다. 여성문제에 민감해 있을 때 퀼트가 마치 여성성을 미화한 착취라고 생각해 좋은 느낌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퀼트에 담긴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보는 것같아 정겨우면서도 너무도 섬세한 한뜸한뜸에 지겨워지기도 합니다. Cheekwood 미술관, Belmont Mantion에서 보았던 세공품과 생활용품 좋기도하고 내가 갖고 싶기도 한, 그런 예술품들에게 대해 갖는 끊임없는 이중성 앞에 혼란을 빚기도 합니다만, 요즘의 나의 태도는 지금 현재 내게 좋은 느낌을 주는 것은 좋은 것이다라고 미완의 결의로 매듭을 짓곤 합니다.

 

테네시 주립박물관을 나와 옆의 Farmer's Market으로 국화화분 하나를 사러갔지요. 교회 장로님 한분의 집에 초대받아가는 길이라 무슨 선물하나 가져갈까 하다가 한국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가을국화 화분 하나를 샀습니다. 한국돈으로 6천원 가량해 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화꽃이 그득한데 국화향은 별로 없습니다.

 

장로집에 초대된 사람들은 잠시 미국에 공부, 연구하러 온 가족들로 아이들 모두해서 약40여명이 넘는 듯 한데도 집이 워낙 커서 부닥치지 않습니다. 모든 장소들이 큼직큼직합니다. 중앙의 거실, 한 켠의 사랑방같은 거실, 큰 부엌, 부엌뒤켠의 넓은 베란다, 대지의 높낮이를 이용해 길에서 보면 2층집같은데 뒤켠에서 보면 4층집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곳 사람들은 땅의 성질을 잘 이용하여 구릉을 잘 이용하고 있어 편안한 곡선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큰 도로에서도 일직선으로 그어 쭉 뻗어낼만도 하건만 꼬불꼬불한 도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장로님 집에서 잘차린 음식을 봅니다.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쓰여진 돈도 상당할 뿐 더러 이를 만들어주는 손길에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생각해도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이 얼마나 인간관계에서 중요한지 다시 한번 감사한 일이라 여깁니다. 먹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대면대면한 사람들이 또한번의 깊은 우의를 다지게 됩니다.

 

일요일 교회예배가 끝난 후 속회모임이 Seven Point Park라는 곳에서 3개 속회가 연합하여 속회예배를 보았습니다. 또 한바탕의 먹는 모임입니다. 친교라는 명분으로 먹자판입니다. 고기를 구워먹습니다. 보기만 하더 것을 그 고기파티에 직접 참가한 것이지요. 냄새를 피우며, 떠들썩하게 각자 해 온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우리 속회 아줌마들은 다가오는 성경대회 준비를 어떻게 할 것인지 걱정하며 역할분담을 하였습니다. 성경대회 같은 것에 생소한 나이기도 하지만 이번 기회에 성경을 읽어보리라 마음 먹습니다. 사무엘 상하, 요한계시록입니다. 더더구나 생경한 분야입니다. 일요일 예배 직전에 하는 성경공부가 재미있습니다. 이 날은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준 여인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전에도 물론 읽었던 부분입니다만 이 날은 그 장면이 어찌나 드라마틱한지 할 말을 잃을 정도이기도하고 할 말이 너무 많아 벅찬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파리새파인 시몬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한다는 말을 들은 한 여인이 찾아옵니다. 찾아와서는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막무가내로 울어댑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그 눈물로 발을 씻을 정도있니다. 그 것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말입니다. 거기다 향유를 부어 딱아 드립니다. 그 시점에서 주인장인 시몬은 속으로 예언자라고 불리우는 저 예수가 과연 죄인 알아보고 있는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 속내를 알아챈 예수, 성경의 몇몇 장면에서 예수는 눈치가 굉장히 빠른가 하면 남의 의중을 단번에 알아채는데 도사입니다. 하여튼 그 예수는 예를 하나 들어 죄의 경중에 따라 하나님의 은총이 비례함을 시몬으로 하여금 인정하도록 합니다. 그리고는 그 여인에게 죄가 사하여졌다고 하고는 평화가 있기를 축도해줍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숨이 턱 막힙니다. 남의 이목을 불사하고 못들어오게하는 사람들이 있었을법도 한데도 뚫고 들어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울며 향유를 부어 예를 올립니다. 그 때 오늘날의 목사나 사람들 같으면 왜 이러시냐고하면 제발 일어나라고 남사스럽다고 했을 것 같습니다. 여인 가운데 죄많은 여인이라면 창녀일 것 같은데 이제나 저제나 창녀같으면 외모에서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는 어찌 그리 태연하게 눈물과 향유의 발씻음을 당하고도 태연히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둡니다. 그리고는 그 여인의 속내와 주인장의 속내를 각각 파악하고는 각각에게 명쾌한 결론을 내려줍니다. 너는 이렇게 하고 너는 저렇게 하라 고. 극적 전환, 그리고 명쾌한 판단력 앞에서 사람들은 마지못해 인정하기도 하고 통쾌해 하기도 합니다.


나는 그 와중에서 늘 양쪽의 입장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 쪽에 가까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 그 여자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남이 죄많은 직업이라고 했지만 자신도 그랬을까. 어쩔수 없이 하는 직업. 오히려 남들로부터 힐난받는 가운데 오는 서러움이 더 컸겠지요. 그래서 과연 내가 죄많고 한많은 인생을 산다고. 그런데 그렇다고 용한 사람이 왔다고 무슨 믿음이 있어 저지선을 뚫고 예수 앞에 갈 수 있었을까. 정말 용감한 여인입니다. 막무가내의 인생입니다. 그 행동 후에 예수가 평화가 있을지어다. 한다고 해서 정말 평화가 왔을까요. 그 직업을 그대로 유지한채로 평화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바리새인은 정말 예수의 결론에 굴복했을까요. 아직 황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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