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 18일
대전지역 문화유산 순례
이춘아 대전문화유산해설사
7월 24일 오전9시 30분 유성문화원에서 출발하여 수운교천단 - 숭현서원 - 동춘당 - 둔산선사유적지 - 충남대 박물관 으로 이어진 올해의 대전지역문화유산순례에는 80여명의 가족이 참여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에서부터 70대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한 버스에 타고 오르내리며 더위를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대전에도 이런 유적이 있고 보호해야할 문화유산이 우리 가까이 있다는 신선함이었다. 신선한 그 느낌에는 지역문화재에 대한 애뜻함뿐 아니라 함께 바라보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확인이었던 것 같다.
전 연령층이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해본 적 있지만 이러한 유적답사를 통해서도 가족이나 다양한 연령층이 공감대를 이룰수 있었음은 의외의 수확이었던 것 같다.
유성문화원에서 출발하는 일정표를 작성할 때 고려되었던 것은 첫째,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문화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확인에는 정보와 함께 애정까지 포함된다. 두 번째는 말로는 들었지만 가보기 쉽지 않은 곳, 세 번째는 오전 9시30분에 출발하여 오후5시까지라는 정해진 시간내에 가장 효율적으로 느끼고 볼 수 있는 곳을 선정하는 것이었다. 진행자의 바램은 참가자들이 과학도시 대전도 알고 보면 오래된 역사를 지닌 곳이고 그 역사속에서 내가 숨쉬고 있으며 역사의 숨결과 맥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일정: 수운교 천단(水雲敎 天壇) - 문화재자료 제12호
군부대인 자운대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정확히 말하면 수운교 천단을 포함하여 그 일대가 군부대로 편입되는 바람에) 문화재라고는 하나 일반인들의 접근성이 쉬운 곳은 결코 아니다. 자운대 입구 헌병의 검문시 당당하게 수운교 천단에 갑니다, 라고 말해야한다. 입구를 통과하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표지판을 따라가다 보면 수운교 문패가 있는 솔밭을 지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천단이 있는 정문을 향해 들어간다. 계단을 올라가면 넓은 잔디 가운데 수운교를 상징하는 표식이 박석으로 무늬를 이루고 있는데 한자로 궁(弓)과 을(乙)이 합해진 디자인이다. 궁은 선이고 을은 불이라하여 선불이 합하여 하늘과 땅을 열어 음양이 드나들며 만물이 생성함을 나타낸다고 한다.
유불선이 하나되는 신흥한국종교의 본산중 하나인 수운교가 바로 우리 대전과 충남을 행정적으로 나누는 금병산 아래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대전에서 보아 금병산 뒤편으로는 또다른 한국의 신흥종교인 금강대도가 자리하고 있다. 금병산을 앞뒤로 하여 유불선을 아우르는 종교단체가 있음은 특이하다.
수운교 천단이라 불리우는 건축의 현판은 도솔천(逃率天)이라고 적혀있다. 이 도솔천 내부에 천단이 모셔져 있으며 이 천단을 후천오만년에 미륵정토의 극락선경시대에 인류의 신앙대상이라고 수운교인들은 믿고 있다. 절 건축만을 보아오던 일반 관람객에게는 도솔천의 내부의 형태가 종교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만들어질 수 있음이 새삼스럽고 정교한 단청과 9포나 되는 공포로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형상에서 천단(天壇)이라는 단어의 장엄미를 느낄 수 있다. 내부의 단청은 1929년 준공당시 그대로 색상을 유지하고 있다. 건축은 경복궁을 지은 최원식 도편수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도솔천 좌우로 석종이 있는데 속이 비어있는지 작은 돌로 쳐도 쇠종소리가 나는 기이한 돌이다. 세계평화가 오는날 이 석종이 저절로 울리리라고 한다. 이 석종도 문화재자료 13호이다. 수운교에서는 이 천단자리가 산태극 수태극의 천하명당이라고 한다. 명당의 기운을 느끼고 난 다음 한군데 더 가볼곳이 있다. 동쪽으로 난 용호문을 나서서 도량장을 지나 금병산 등산로 길로 올라가다 보면 봉령각이라고 있다. 그곳 입구에 서면 대전시가 내려다 보이고 대전을 둘러싸고 있는 겹겹의 산들이 이곳을 향해 예를 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봉령각 뒤편 제단 아래에 돌너와가 쌓여져 있다. 봉령각 역시 1929년에 만들어졌는데 그 당시 돌너와집이었다고 한다. 화재로 1946년 다시 건축하면서 기와를 얹었다.
두 번째 일정: 숭현서원(崇賢書院): 기념물 제27호
조선시대의 학교는 어떻게 생겼을까 보여줄 수 있는 곳이 숭현서원이다. 유성구 원촌동에 위치하고 있는 숭현서원은 최근까지 숭현서원 지(址)라 불리웠던 곳으로 1600년대에 만들어져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94년 이후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2001년에 복원되었다. 서원이 있던 곳의 지명은 원촌 또는 원골이라 불리우며, 향교가 있는 곳은 교촌 등으로 불리우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진잠향교가 있는 일대의 지명도 교촌동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립학교가 서원이었다면 공립학교는 향교였다. 이번 답사에서 진잠향교를 일정에서 빠뜨린 것이 아쉽다. 진잠향교의 주변이 개발되면서 일년전만해도 한적했던 분위기를 상실하여 굳이 가고 싶지 않아지기도 했다. 진잠향교도 그렇고 숭현서원도 입구문이 이층형태로 문루라고 불리우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 보는 경치가 아주 좋았을 것이다. 숭현서원의 문루의 이름은 영귀루(詠歸樓)라고 한다. 영귀루에 올라 선비들이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시를 읊었다고 한다. 지금은 골프장과 건물로 가리어져있지만 갑천과 계족산이 보이는 산수가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복원된 숭현서원에서 옛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은 묘정비 기단돌과 사당의 주춧돌 몇 개이다. 입교당이라 불리우는 강당을 중앙에 두고 양옆에 기숙사로 사용되었던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입교당 뒤편으로 사당이 있다. 사당에 8현을 모시고 있다하여 숭현(崇賢)서원이라 하였다. 8현은 정광필, 김정, 송인수, 김장생, 이시직, 송시영, 송준길, 송시열 선생으로 1400년대에서 1600년대 이 지역에서 영향력있는 사림들이었다.
사학의 명문이었을 서원에는 지역의 인재양성과 지역의 존경받는 인물을 사당에 배향함으로써 배향인물을 본받고 그 정신과 학풍을 배우게 했을 것이다. 서원의 동재 서재의 규모로 보면 20여명도 수용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곳과 직간접으로 관여했을 인재들은 많았을 것이다.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아버지이신 송이창 선생 밑에서 송시열선생이 어려서부터 배웠다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숭현서원에 와서야 그 송이창 선생이 바로 숭현서원의 입교당을 건립한 원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송준길 선생 역시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송시열 선생도 숭현서원 운영에 깊이 관여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18세기 회덕일대의 지도를 보면 숭현서원(당시 숭현사 라고 쓰여있음)도 포함되어 있다.
지도의 그림은 그 당시 관아를 중심으로 주요건물만 표시되어 있어서인지 동춘당에서 숭현사까지 가깝게 보인다. 지금의 원촌교를 통해 왕래했을 것인데 그 당시 배로 건너갔을까 아니면 징검다리라도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세 번째 일정: 동춘당 - 보물 제209호
문화재분류에 의하면 동춘당은 국가가 지정한 보물에 해당한다. 대전에서 보물로 지정된 것은 동춘당과 이색영정이나, 이색영정은 일반인이 볼 수 없는 서화이다. 참고로 문화재에는 분류명칭이 있다. 국보, 보물, 사적,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 문화재자료 등의 명칭이 그것인데 대전의 대표적인 보물이 동춘당이며, 사적으로는 계족산성이 있고, 유형문화재로는 송자대전판, 수운교천단 등이 있고, 무형문화재로는 웃다리 농악, 기념물로는 숭현서원지, 둔산선사유적지가 있으며, 민속자료로는 송용억가옥이 있고, 문화재자료로는 도산서원, 진잠향교 대성전, 수운교 석종 등이 있다.
동춘당은 송준길 선생의 호이기도 하지만 건축물의 이름으로도 불리운다. 아버지 송이창 선생이 세운 건물었던 것으로 현재의 위치에 옮겨 다시 짓긴 했지만 조선중기 이전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송준길 선생의 단아한 선비모습을 연상케하며 건축적으로는 황금분할구도의 비례라고 한다. 각도에 따라 건물의 모습이 달라 보인다. 동춘당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지 6년되던 해에 7,8세부터 함께 공부하며 호형호제하였을 송시열 선생이 친필로 쓴 것이다. 송시열선생이 1607년 생이고 송준길선생이 1606년생이지만 송준길선생은 68세로 돌아가셨고 송시열 선생은 83세에 사약을 받고 돌아가셨다. 송시열 선생의 글씨는 사람에 따라 느낌을 달리하여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렇게 보면 현판의 同春堂 글씨체로 미루어 송준길 선생의 모습을 가늠하게 해준다.
송촌동의 동춘당에 가면 바로 뒤에 동춘고택도 볼 수 있고 오른편으로 송용억 가억도 볼 수 있다. 동춘고택과 송용억가옥 사이 길옆에 돌로 만든 시비가 있다. 현재 아흔이 넘으신 송용억 어른의 10대조 할머니 되시는 호연재 김씨의 야음(夜吟)이라는 시(詩)가 새겨져 있다.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으로 대전이 자랑할 여성인물이다. 송준길 선생의 증손주 며느리이기도 한 호연재 김씨는 많은 시를 썼고 그 집안에서 호연재 김씨의 시를 모아 여러권의 시집을 만들어 대대로 필사하여 읽어왔고 보존하였다. 송용억 가옥에는 집안 부녀자의 살림살이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주식시의] 등의 책도 보관해오고 있다.
네 번째 일정: 둔산동 선사유적지 - 기념물 28호
1990년 12월 대전시가 발간한 [한밭의 얼]이라는 책의 머리말에는 “우리 고장 한밭은 청동기 시대의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던 것을 비롯하여 ...” 로 시작하고 있다. 1991년 둔산지역 일대가 신도심을 개발하기 위해 땅을 고르는 과정에서 구석기 유적, 신석기 유적, 청동기 집자리유적이 발굴되었다. 책을 발간한지 1년만에 대전역사서를 새로 써야했던 것이다. 둔산에 이어 구즉동 송강택지개발을 하면서 구석기 유물이 나왔고, 노은동 월드컵 경기장을 만들면서 구석기 유물이 나왔다. 명실공히 대전역사는 10만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시외버스터미널 부지로 예정되었던 곳에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유적이 유래없이 한 곳에서 발견됨으로써 그곳은 터미널이 취소되고 선사유적지가 되었다. 선사유적지 옆 도로변에 시외버스 간이정류장을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된다. 번듯하게 지어졌을지도 모를 시외버스정류장과 그 주변의 번잡함, 그러나 선사유적지로 지정되어 정비되면서 주변은 ‘선사....’ 라는 간판을 안겨주었고 쾌적한 공간을 안겨주었다. 간판들을 볼 때마다 ‘선사’라는 명칭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 이전의 시대 ‘선사(先史)’는 중고등학교때부터 그랬지만 문화유산해설사가 되기 공부하면서도 제일 재미없는 분야였다. 하지만 선사유적지에 배치되어 관심을 갖고 보니 가장 재미있는 분야가 되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가끔 생각하면서 우리의 생활을 돌이켜보게 된다. 결국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생물에게는 생존 그자체가 가장 우선하며,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하며, 개척하며 살아온 것이 인류사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양의 사람들은 환경에 도전하며 살았고 한국사람들은 환경에 순응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려고 했다는 간단한 결론만으로도 문화의 양태는 달라지는 것 같다.
갑천에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둔산의 언덕에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사람들 역시 갑천에 내려가 물고기를 잡아오고 주변의 땅을 개간하여 논밭을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 사용했던 빗살무늬, 민무늬토기에 저장하기도하고 곡식을 빻아 죽을 쑤어 먹기도 했을 것이다. 작가 김훈의 [빗살무늬토기에 대한 추억]이라는 소설이 있다. 내용은 생각했던과는 달랐지만 어쨌든 토기의 빗살무늬 하나로 한권의 소설책이 쓰여지는 상상력으로 그 시대를 들여다보는만큼 무궁무진해질 수 있는 것이 선사시대이다.
둔산선사유적지에 오면 청동기시대 움집 2채, 신석기시대 움집 2채, 그리고 FRP소재로 만든 고인돌 4기가 복원되어 있다. 그곳에서 중학교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문자적 내용만으로도 살아서 움직이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다섯 번째 일정: 충남대 박물관
선사유적지에서 해설활동을 하다보면 아쉬운 것이 자료관이라도 있어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끝나는 말이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은 충남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현물을 보세요, 이다. 버스로 연결지워 순례를 하는 순서인 만큼 욕심을 내어 충남대 박물관으로 일정을 잡았다. 충남대 박물관에는 둔산 지역뿐아니라 대전, 충남 일대에서 발굴된 선사유물과 원삼국시대, 삼국시대의 유물들을 볼 수 있다.
발굴지 현장에서 한켜한켜 흙을 들어내고 붓으로 털어가는 작업을 하다가, 이거다 하는 유물이 드러나는 순간 ‘전율’을 일으킨다고 어느 사학자가 말했다. 관람객이 전시장에서 전율에 가까운 소름이라도 약간 돋았다면 전시장 관람은 성공이다. 상상력이 풍부한 만큼 시대의 현물을 보는 순간 전율이 일어날 것이라 여겨진다. 선사시대의 재미는 상상력 게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