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박 8일간의 실크로드 답사기②
중국 진시황 병마용갱박물관의 미스테리
2003.10.10
이춘아
먼 길 나들이였지만 그리 피곤하지는 않았습니다. 도착한 다음날 이런 저런 집안일을 하며 푹 쉬었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관련한 비디오를 빌려 보고 싶어 가게에 갔더니 실크로드 답사를 마무리 해줄 수 있는 비디오 한편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장예모 감독, 이연걸 주연의 [영웅]이라는 비디오였습니다.
이 영화가 여행의 처음과 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라고 한다면, 실크로드 답사와 왠 상관? 하겠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그러했습니다. 중국을 통일하기 직전 진시황(秦始皇)에 얽힌 이야기인데 그 배경은 돈황의 양관과 투루판의 옛 고성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진시황 무덤 아래 깔려있을 어마어마하게 큰 궁궐, 병마용갱에서 보았던 거대한 군사들, 지평선으로 드리워지는 사막같은 황토, 흙으로 쌓아올렸다가 2천년이라는 세월에 조금씩 서서히 무너져내린 황토성들이 영화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우리 일행이 보았던 것들을 상징적 이미지로 재현해주고 있음에 감탄하며 영화 [영웅]을 보았습니다.
만약 답사를 다녀오지 않고 [영웅]을 보았더라면 바로 이거야 하는 맛은 느끼지 못했을 것같습니다. 적절한 시점에서 이 영화를 만나게 된 것이 마치 운명처럼 여겨졌을 정도였습니다.
거대한 무덤 주위로 흙인간 병마용갱에 압도
여행의 첫 시작지인 서안은 진시황의 무덤과 인근에 있는 병마용갱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작년 서안-정주-낙양 답사시에도 가보았던 곳이지만 작년에는 거대함에 압도당했다면 이번에는 작품을 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흙으로 빚어 구워만든 병마용(兵馬俑)은 하나하나가 조각작품입니다.
<진시황 병마용갱박물관>은 발굴된 장소 1호갱, 2호갱, 3호갱을 콘크리트 구조물로 덮어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며 진시황릉에서 약 1.5Km 떨어진 곳입니다. 산처럼 큰 진시황릉를 중심으로 1.5Km 반경을 돌리면 그 전체가 진시황릉의 영역이 될 것 같습니다.
중국 [사기(史記)]에 따르면 진나라 시황(始皇)은 37년간 재위했는데 13세 때 즉위하면서부터 자신의 능묘를 만들었다고 하며, 재위 26년째 되던 해에 천하를 통일하고 본격적으로 공사를 진행시켰는데 죄수 70만 명을 동원하여 땅속의 물길 세 개를 내려가는 깊이로 파서 동(銅)을 부어 구획지은 다음 궁전을 만들고 문무백관의 상(像)을 만들어 배치하고 기기진괴한 갖가지 생활용품을 가득 채웠습니다. 또 자동발사장치가 달린 돌화살을 만들어 도굴자가 들어오면 사살하도록 장치하였으며,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고 강의 흐름이 끊임없이 환류되도록 설계했습니다.
궁전의 천장에는 일월(日月)성신(星辰)을 만들고 바닥에는 중국의 지도를 만들었으며, 인어기름으로 불을 밝혀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또한 보물이나 장치들이 외부에 알려질까 염려하여 시황의 관(棺)을 안치한 사람들이 현실(玄室)의 문을 잠그고 출구로 연결된 길로 나왔을 때 입구를 막아 전원을 생매장시켜버렸습니다. 묘위에는 높이 500척, 주위 5리의 분구를 쌓고 초목을 심어 자연스런 산처럼 보이게 했다고 합니다.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진시황릉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발굴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강과 바다를 만들기 위해 퍼부은 수은의 독가스가 올라와 그 공간이 가스로 가득 찬 상태인데 공기중의 산소와 결합하게 될 경우 거대한 폭발이 우려된다는 것입니다. 산처럼 보이는 황릉은 잔디가 아니라 석류나무로 가득 심어져있습니다. 저희가 갔을 때 탐스러운 석류가 열려있었습니다. 하지만 석류를 먹지 말라고 합니다. 석류가 땅속에서 올라온 수은가스에 오염되었을 것이라 합니다.
중국 [사기]의 내용이 너무나 엄청나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깃거리라고 하기에는 발굴된 병마용갱의 규모가 너무나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어서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병마용갱은 1974년 농업용 우물을 파다가 4m정도 내려가니 토기 파편이 나왔고 1m 정도 더 내려가니 병용의 얼굴이 나타나서 당국에 보고하여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한 양배언이라는 농부는 현재 박물관에서 병마용갱 도록을 팔고 사인해 주는 것이 직업이 되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을 첫 통일한 진시황은 이천년 후에 불현듯 나타나 관광사업으로 전 세계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병사와 말의 모습인 병마용(兵馬俑)은 진흙으로 형상을 만들어 가마에서 한번 구운 후 표면에 투명한 아교를 칠한 다음 채색하여 사실적인 모습을 갖고 있었으나 그동안 탈색되어 지금은 청회색으로 보입니다만 간혹 몇 개는 부분적으로 색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활을 당기는 병사의 모습, 무릎을 굽히고 있는 신발바닥의 정교함, 심지어는 머리를 빗어올린 선명한 빗자국과 눈썹, 손금까지 새겨져 있습니다.
진시황 관련 관광사업 발달한 중국
장예모 감독이 만든 영화 [영웅]은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한 무사들의 대의(大義)와 대의에 희생된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대의에는 진시황으로 하여금 하루라도 빨리 천하를 평정케 함으로써 고초를 겪고 있는 많은 백성을 도탄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더 큰 대의명분을 깔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만리장성으로 유명한 진시황은 기원전 259년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로 출생하여 13세에 왕이 되어 22세에 친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여불위를 제거하고 실권을 쥐고 38세에 중국을 통일하고 49세에 사망했습니다.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따온 황제라는 명칭은 인간만이 아닌 우주만물의 지배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때부터 2천년간 중국의 왕은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해왔습니다. 그래서 시(始)황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진시황은 중국을 명실공히 통일정책을 강행했습니다. 황제라는 이름으로 칭호케 하였고 호족과 부호들을 흩어놓는 이주 정책, 통일 이전의 각국의 문자와 사상을 통일하고 군현제(郡縣制)를 통해 중앙집권을 하고, 화폐와 도략척, 이동의 중요수단인 수레바퀴도 통일시킵니다. 그리고 만리장성과 여산릉과 아방궁을 건설하였다고 합니다. 무리한 건설작업으로 민란이 일어나고 진시황 사후 4년 뒤인 기원전 206에 진나라는 멸망합니다.
기원전 206년, 우리나라는 고조선 시대이며 철기시대 이전의 청동기 시대였습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 진시황릉 같은 거대한 것으로 중국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고조선 지역을 뒤덮고 있는 전 세계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3만여 기에 이르는 고인돌은 왜 그 시기에 그렇게 많이 이 땅에 집중되어 있을까.. 과연 미스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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