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안희경, [이해인의 말], 마음산책, 2020.
(84~ 92쪽)
이해인: 그때 일상에 대해 한 가지 깨우친 것이 있었어요. ‘우리는 항상 결심을 많이 하는구나, 하지만 너무 아프면 결심도 좀 자제하고 잔소리도 덜 하며 자연스럽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픈 사람을 보고도 고통을 통해서 어떻게 영성을 다뤄야 할지에 대해 충고하거든요. 그럼, ‘좀 내버려두지, 우리는 너무 앞서서 훈계하려는 기질이 있구나’ 돌이켜보게 됩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어디 가서 컵 하나 비뚤어진 것을 못 봐요. 그래서 가족들이 수도원에 있는 언니, 오빠가 휴가 나오면 불편하다고 그런대요. 맨날 쓸고 닦고 반듯하게 있어야 하고 자기들의 문화를 가정집에서까지 요구한다고요.
안희경: 수녀님들이야말로 생태적으로 사시잖아요. 검박, 검소의 상징답게 최소한의 소비만 하시면서요.
이: 그래도 다들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공동체 생활은 선함만 갖고는 되지 않고 슬기로운 덕목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인간관계 안에서도 그렇고 선택할 때도 순간의 지혜로움이 필요해요. 눈길 한 번만 잘못 줘도 편애하는 행동이 됩니다. 피교육자 입장에서는 선생 수녀님들이 은근히 편애하는 경향을 느낄 수 있는데 ”해인 수녀님은 뜻밖에 편애를 하지 않는 분“이라고 해요. 제가 노력은 하지만 그렇게 보였다니 너무 기뻤어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누구나 편애에 민감합니다.
안: 친구나, 직장 동료처럼 익숙해진 사이에서는 하던 대로 하기가 쉬운데요. 관계에 있어서 무엇이 슬기로운 태도일까요?
이: 내가 한 단계 낮아지고 겸손해야 설사 관계가 삐걱거려도 회복할 수 있어요. 충고할 때도 그 사람의 입장을 먼저 헤아리면서 져주는 입장을 갖고요. 충고를 쪽지로 할 것인지, 말로 할 것인지 계획할 필요가 있어요. 상대편 반응에 충격을 받았다면 일단 그 자리에서는 한 번 “왜 그래?” 정도로만 하고, 재차 따지지 않고 평소처럼 대할 때, 상대도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며칠 전 제게 크게 화를 냈던 어느 수녀님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제게 문자를 했어요. 자신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고, 남자 형제들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직선적으로 말하는 습관이 있다고요. 마음 상했다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지내온 경험이 달라요. 다들 영혼의 빛깔이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맞도록 나를 끼워서 연구해야만 우정을 키울 수 있습니다.
안: 한편으론 불편하다고 표현해야 할 때도 있잖아요. 당신이 계속 이러면 화가 날 것 같다는 일종의 경고를 해야, 극단으로 치닫는 대립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제가 수도원 안에서 몇 번 크게 신경질도 내보고 화도 내봤어요. 그런데 그 후에 다다르는 마음 상태가 지옥이고 연옥이더라고요. 너무 괴로워서 이제는 웬만하면 미리 상상을 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상상의 관 속에 누워보듯이 내가 있는 대로 소리 지르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을 앞당겨 하고 나를 위해 참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한 마음을 먹어요. 참는 연습으로 길들인다고 할까요? ‘내가 이런 것 가지고 그러나, 수도자로서 본성 하나 극복하지 못하면 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원래 갖고 있던 성향에 비해서 이제는 매력이 없을 정도로 둥글둥글해졌어요. 어떤 사람은 “수녀님 옛날에 샤프했는데, 다 어디갔냐“고 해요. 그래도 저는 노력해서 이만큼이라도 된 것이 기뻐요.,
안: 스스로 객관성을 취하려는 자세가 바로 의식을 차려 현재를 성찰하는 자세겠죠?
이: 그렇죠. 의식을 붙들고 있는 거죠. 암 걸리고도 지난 12년 동안 단 한 번도 내 아픔 때문에 스스로 불쌍해하며 울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 음악이나 슈베르트 음악을 듣고는 울어도 그런 눈물은 안 흘렸어요. 그러니까 어떤 시인이 저보고 스스로 속이는 것일 수 있으니 아무도 없을 때 성당에 가서 혼자라도 울어야 한다고 이메일을 보냈어요. 그래야 몸과 마음의 독소가 빠진다고요. 그 말도 일리가 있겠다 싶어서 밤 10시 넘어 혼자 성당에 갔습니다. 성모상 앞에서 울려는데 눈물이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위선이 아니라 내가 뜻을 정한 대로 되고 있구나 생각했어요. 우리 어머니가 강원도 분이고 감자바위 같은 영성을 갖고 있듯이 양구에서 태어난 산골 소녀인 제게도 산이 주는 우직한 감자바위 영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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