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칼럼

깨달음

이춘아 2021. 3. 30. 10:08

2021. 3. 30 화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이춘아 


어려서는 ‘저렇게는 되지 않아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어느 시간에 와서는 ‘이렇게 되어야겠다, 또는 이것이 맞지 않을까’하며 살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했었다. 그 질문은 여전히 세상사에 판단을 유보하게 한다. 늘 이거다 저거다 라고 확정짓지 못하게 한다. 때로는 우유부단 해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시간이 좀 지나 그때 확정짓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기도 했다.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쓰려니 떠오르는 단어가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이다. 매일매일은 뭔가 하며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딱히 ‘이렇게’는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얼마전 나이 육십이라 했는데 벌써 육십오를 찍고 있다. 우물쭈물하다 일흔, 이럭저럭 살다보니 일흔다섯 여든. 그것도 건강하다는 전제하에 우물쭈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몸이 자유롭지 않으면 그나마의 생각대로 살아질 수 없다. 그러니 몸의 건강이 우선인 것은 맞다. ‘카일라스 가는 길’의 이춘숙 할망구가 부러우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일 일이다. 

어제 하나의 목표는 정했다. 지난 한 해 동안 블로그에 책 소개를 하게 된 과정을 적어보니 의미가 있어서, 그것은 앞으로도 해나가야할 나의 일과이다 라고 했다. 그것은 내가 매일 밥을 먹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라는 책을 보며 공감은 하지만 그것은  삶의 에티켓이다. 에티켓 조차 잘 지켜지지 않고 살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게 했다. 그런 에티켓 조차 내 것으로 열거하지 못하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는 생활수칙이 아닌 내가 궁금해하는‘깨달음’이다. 이제까지 내 삶에서 가장 기본의 정조는 ‘깨달음’이었다. 뭔가 깨달았다고 여겼을 때 가장 기뻤다. 무슨 원리라도 찾았을 때 가장 기뻤다. 그것이 진리이든 생활수칙이든 내가 깨달았을 때 삶이 충만한 것 같았다. 그것이 공부라고 생각했다. 철들고 나서 늘 그것이 기본이었고 ‘공부’로 가장했다. 

조금 전 읽었던 [노자]의 67장 마지막 대목 
‘천장구지, 이자위지(天將救之 以慈衛之)’  - 하늘이 장차 그 사람을 구원하려고 한다면 자애로움으로 그를 막아주고 감쌀 것이다. 
이 대목을 나는 ‘내가 자애를 베풀면 그것이 돌아와 자애가 나를 구원해줄 것이다’라고 정리했다. 도올 선생은 그러한 간단한 도식이 아니라고 한다. 

내가 선을 베풀어, 또는 내가 자애로움을 베풀어서 그것이 나에게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물과 인에 자애로워져서, 그것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체화되고 천하가 그를 구원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어느날 자신을 막아주고 감싼다는 것이다. 

나의 깨달음은 내가 베풀면  보답이 돌아온다는 주고 받는 공식이 아니라는 것. 우리는 섣불리 인과응보를 생각하고,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다는 속담으로 살고 있다. 노자는 그러한 공식을 바꾸어준다. 일대 일의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한 깨달음이 있을 때 나는 마음이 흡족하다. 

앞으로도 이러한 깨달음을 계속 해가며 살아가고 싶다.

'단상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일  (0) 2021.04.09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0) 2021.04.06
나 여기 있소  (0) 2021.03.29
맞춤복  (0) 2021.01.27
아버지의 노자  (0) 2021.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