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452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하고

[뿌리깊은 나무] (1976년 3월, 창간호) ‘창간사: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하고’ 좀 엉뚱해 보이는 이름을 지었읍니다. 뜻이 넓을수록 훌륭한 이름으로들 치는 터에, 굳이 대수롭잖은 “나무”를, 더구나 뜻을 더 좁힌 “뿌리깊은 나무”를 이 잡지의 이름으로 삼았읍니다. 우선 이름부터 작게 내세우려는 뜻에서 그랬읍니다. 이 이름은 우리 겨레가 우리 말과 우리 글로 맨처음으로 적은 문학작품인 의 “불휘기픈남간...”에서 따왔읍니다. 이 땅에서는 “어제”까지도 가을걷이와 보릿고개가 해마다 되풀이되었읍니다. 열두달 다음은 “오늘”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고 이들의 팔자는 아비의 팔자를 닮았었읍니다. 아마도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의 걸음이 이 땅 사람들이 “어제 까지 일하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또 그들은 ..

'보람 있는 삶'

헬렌 니어링 & 스코트 니어링, [조화로운 삶의 지속], 보리, 2002. ‘보람 있는 삶’ 이 세상 수많은 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우리는 조화로운 삶을 찾고 있다. 단순하고 균형 있고 만족스런 생활 양식을. 다른 이들처럼 우리도 힘을 보태서 이 세상을 아늑한 삶의 공간으로 다듬고 싶었다. 인류와 다른 많은 생물들이 어머니인 땅에서, 그 어머니의 품 속에 펼쳐진 흙과 젖무덤에서 흐르는 물에 감싸여 꾸준히 삶을 이어 갈 수 있도록. 조화로운 삶을 사는 데 당장 필요한 것은 먹을거리와 집이다. 이것이 생존의 기초다. 이 밑바탕 위에서 개인과 식구, 사회 공동체가 더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교육과 여가와 여행을 계획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4-4-4 공식으로 조화로운 삶의 특성을 적어 내려 가겠다...

'우리가 하는 일'

헬렌 니어링 & 스코트 니어링, [조화로운 삶의 지속], 보리, 2002. '우리가 하는 일' 북적거리는 도시에서 우리를 찾아온 이들은 이렇게 묻곤 한다. “시간이 나면 뭘 하고 지내나요?” “우리에겐 남는 시간이 없어요. 늘 바쁘답니다.” 이것이 우리 대답이다. “사실 하루하루가 너무 짧아서 늘 시간이 모자라요.” “하지만 재미삼아 하시는 일이 뭐라도 있을 거 아녜요?” 사람들은 끈질기게 물어 댄다. “우리가 하는 일은 뭐든지 만족스러워요. 우리가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면 또다른 일을 하겠죠. 아니면 좀더 나은 방법을 찾아서 일을 하든가요.” “우리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하다고요?” 우리는 물음을 던진 사람에게 이어서 말한다.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굵직굵직한 일을 말해 볼까요. 먹을거리를 다듬..

모든 꽃은 언젠가 핀다

박웅현 외, [안녕 돈키호테], 민음사, 2017. ‘모든 꽃은 언젠가 핀다’ - 박웅현이 만난 소리꾼 장사익 모든 사람은 꽃을 피우는 시기가 있다. 늦게 피는 꽃도, 일찍 피는 꽃도 있다. 꿈이 있다면 언젠가 꽃은 피기 마련이다. 보험사에서 사무를 보다가, 가구점에서 캐비닛을 옮기다가, 카센터에서 손님 응대를 하다가, 사십 대가 되어서야 마침내 소리꾼으로 꽃을 피운 장사익을 만나 본다. 박: 저기, 악기를 좀 하셨더라고요. 따로 배우셨어요, 취미 생활이셨어요? 장: 저는 악기를 배웠죠. 국악기를. 1985년도에 처음으로 배웠죠. 직장 생활하면서 틈틈이, 저녁에. 박: 그럼 아마추어로, 취미로 배우신 거예요? 장: 그렇죠. 실은 제가 1967년부터 3년 동안, 1970년도에 제가 군대 갔었거든요. 지금 ..

이상한 책 이상한 잡지 이상한 사람

박웅현 외, [안녕 돈키호테], 민음사, 2017. ’이상한 책 이상한 잡지 이상한 사람’ (김하나 씀) ...... 그러나 [뿌리깊은 나무]는 4년 남 짓 발행되는 동안 우리나라 잡지의 역사를 모조리 다시 쓰며 굉장한 성공을 거둔다. 매호 8만 부를 훌쩍 넘게 찍었으니 당시 가장 잘나가던 월간지 부수의 두세 배쯤 팔린 셈이다. 망할 짓만 골라 하는 한창기의 행보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돈키호테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선 하나하나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튀어 보이기 위해, 다르기 위해 다름을 추구하는 짓을 혐오했다. 그가 일평생 추구한 것은 자신의 까탈스러운 기준에 맞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우리말과 한글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외국 한번 안 나가고도 영어를 신기할 정도로 잘해 브리태니..

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 말

박보나, [태도가 작품이 될 때], 바다출판사, 2019. ’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 말’ 박이소(1957~2004) 작가의 본명은 박철호다 뉴욕에서 공부하고 작업하던 때에는 ‘박모’라는 작가명으로 활동했다. 박 ‘아무개’를 뜻하는 ‘모’라는 이름에도, ‘다른 곳’을 의미하는‘이소’라는 이름에도, 작가의 고민과 세상에 대한 태도가 담겨 있다. 박이소는 작업의 주제로, 주변부로서의 한국인의 정체성과 탈식민주의를 다룬다. 1984년 그는 사흘간 단식한 후에 무쇠 밭솥을 목에 길게 늘어뜨려 매달고 뉴욕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퍼포먼스를 했다. 천형처럼 목을 죄어 당기는 밭솥은 작가에게 깊숙이 새겨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었다. 이 작업은 바이올린을 끈으로 묶어 끌고 다녔던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떠올리게 하는데, ..

그 어떤 똑똑한 생각보다 훨씬 위로가 될 때

박보나, [태도가 작품이 될 때], 바다출판사, 2019. ‘그 어떤 똑똑한 생각보다 훨씬 위로가 될 때’ 윤석남 작가의 (2008)는 혼자서 1,025마리의 유기견을 돌보는 이애신 할머니와 유기견들을 조각한 작품이다. 작가는 5년 동안 손수 나무를 하나 하나 깎고, 다듬고, 채색해서 이 작품을 완성했다. 놀랍게도 1,000개가 넘는 개체가 각기 다른 표정과 자세를 가지고 있다. 한 마리씩 나무를 자르고 칠하기를 반복하고, 얼굴을 들여다보고, 다듬으며, 작가가 유기견 조각들과 함께 보낸 오랜 시간이 이들의 각기 다른 모습에서 나타난다. 누군가는 모진 마음으로 내다 버린 유기견들을 윤석남은 한 마리 한 마리 쓰다듬고 이름을 불러주는 마음으로 그려낸다. 작가가 눈에 담은 유기견들은 더 이상 그냥 버려진 개가..

'음악이란'

임현정, [침묵의 소리](양영란 번역), 도서출판 참미래, 2016 '음악이란' 음악이란 한 음과 다른 음 사이의 거리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음악인이다. 건반 터치부터 루바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바로 이 인식에서 비롯된다. 나는 “각자의 안에 들어 있는 음악 DNA는 건드리지 않으며” “최소한만 가르친다”는 그의 관심 깊은 배려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각자가 진실된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것에 충실할 것을 바르다 교수님은 많이 강조하셨다. 내가 바르다 교수님께 그의 큰 은혜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할 때마다 지극히 겸허하게 나에게 하신 그 말씀은 얼마나 벅찬 감동이었던가! “현정아, 이것만은 확실하구나. 난 네가 진실한 너 자신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임현정, [침묵의 소리](양영란 번역), 도서출판 참미래, 2016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작품을 연주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작품과 함께하지 않으면 우리 삶의 의미마저 사라지는 듯한 것을 뜻한다.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느라 밥 먹는 일마저 잊어버리는 것이며, 손가락이 몹시 아프고, 밤에도 연습을 하기 위해서 문득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나의 몸 안에서 음표들이 펄떡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며, 열광이 나의 몸을 휘감는 것을 뜻한다.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을 전적으로 작품에 내어주는 것을 뜻한다.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지혜가 있든 없든 개의..

아리에 바르디와의 첫 레슨

손열음,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 중앙북스, 2015. ‘아리에 바르디와의 첫 레슨’ 누군가 나에게 음악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경험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기억이 나는 시점부터 줄곧 음악만 해왔으니, 기억에 남는 여러 충격적인 경험도 실은 수없이 많다. 연주 중 저지른 충격적인 실수, 만족스러운 연주 후의 충격적인 쾌감, 또는 무심코 찾아간 음악회에서 받은 충격적인 감동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번에 그날을 떠올리겠다. 2004년 8월, 그의 명성을 듣고 수소문해 찾아간 독일의 작은 마을, 고슬라의 한 여름 음악캠프. 그곳에서 있었던 내 스승 아리에 바르디와의 첫 레슨 말이다. “나는 위에 가서 들을게, 그래도 되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넨 그분이 이윽고 성큼성큼, 2층 발코니로 ..